1.29(목).26 매일성경읽기 QT 불안정한 땅에서 드러난 '믿음의 실상' I 한상인 담임목사 Publish on January 29,2026 | 서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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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목).26 매일성경읽기 QT 창세기 20:1-18
불안정한 땅에서 드러난 '믿음의 실상' I 한상인 담임목사
창세기 20:9-11 [새번역]
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들여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당시 가나안 땅, 곧 [헤브론 지경] 마므레 상수리 수풀(창 18장)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여러 족속이 각축하던 요충지였고, 외부 세력의 침입과 충돌이 빈번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장막을 걷고, 팔레스틴 남부 지역인 네게브(Negeb, 남방)로 이동하여 [그랄] 지역에 머물게 된다.
이 이주의 직접적인 이유는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헷 족속>의 활동을 고려할 때, 헤브론 일대의 긴장과 위협 속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브라함은 신앙인 이전에, 한 부족을 이끄는 현실 감각이 매우 뛰어난 족장이었다.
그랄을 다스리던 왕(아비멜렉)과의 만남은 아브라함의 처세술과 인간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브라함은 “이 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20:11)이라 판단하였다. 이는 그의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경은 이러한 인물을 통해, 한 사람이 어떻게 추상적으로 보이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 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완성된 신앙이 아니었다.
그랄 왕이 <사라>를 데려간 사건은 오늘날의 윤리 기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왕>은 '절대적 권한'을 가졌으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외교적' 이유로 여인을 취하는 것은 그 시대의 관습으로 가능했다.
더욱이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 한 이유는, 90세에 가까운 사라의 미모라기보다는, 그 땅에 이주한 부유하고 강력한 족장 아브라함과의 정치적 동맹, 곧 '정략적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랄 왕은 결과적으로 [객관적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무죄]였다.
그는 아브라함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더 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직접 개입하시고, 병을 주셨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일로, 주님께서 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다.]” (창 20:18)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이기 이전에 "보호"와 "예방"이었다.
아비멜렉의 항변은 매우 날카로웠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지 않았소?” (20:9)
놀랍게도 이 장면에서 도덕적 우위에 서 있는 인물은 이방 왕이다. 아브라함의 동기는 이해할 만한 사정은 있었지만, 의롭다 선언되지 않는다.
반면, 아브라함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랄 사람들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나타난다.
“그들이 이 일을 다 듣고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20:8)
아브라함은 “이 곳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11절)고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그들 가운데 존재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러한 사건에 대한 해석을 매우 명쾌하게 제공한다.
16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부끄러움)과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대조적인 표현처럼 보인다.
이는 아브라함의 삶에 전혀 실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 일컬음을 받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적용 및 오늘의 기도]
불안정한 이민 생활 한가운데서, 오늘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나와 내 가족의 참된 안정을 보장해 줄 땅을 찾아 끝없이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확실한 현실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도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11절)고 쉽게 단정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 안에 머물렀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함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불안정한 이민자의 삶 속에서 잦은 실수와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부끄럽다 하시며 얼굴을 돌리실 분은 결코 아니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기꺼이 "OOO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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